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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단독 주연>
고현정, 김지용, 문현지, 박계희, 방재현, 이민선, 임유정
2020. 09. 05 - 09. 20 



- 날짜 : 2020년 9월 5일 토요일 - 9월 20일 일요일
- 참여 : 고현정, 김지용, 문현지, 박계희, 방재현, 이민선, 임유정
- 장소 : 중간지점 (서울시 중구 을지로 14길 15 장양빌딩 703호)
- 운영 시간 : 오후 1시 - 오후 7시 (매주 월요일, 9월 19일 휴무)
- 기획 및 주최 : 중간지점
- 협력 기획 : 이문석 (독립기획자)
- 포스터 디자인 : 찬다프레스

*9월 19일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 진행으로 인해 휴관합니다.
이번 전시의 마지막 날인 9월 20일에는 전시의 또 다른 광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.
* 코로나19의 확산 예방을 위해 별도의 오프닝은 진행하지 않습니다. 중간지점은 전시장을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고 관리할 예정입니다. 또한, 전시장 내 관람 인원을 10명으로 제한합니다. 전시장 방문 시 꼭 마스크 착용해 주시고, QR코드 접속을 통한 방문객 명부 작성을 부탁드립니다.



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

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좁은가.

‘나’와 ‘자아’를 의미하는 글자 ‘我(아)’는 본래 “창으로 상대를 해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”는 의미라고 한다. ‘나’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먼 옛날, ‘나’란 다른 이의 접근을 불허하는 적의의 면적이었다. 반대로 말하자면, ‘나’로 꽉 채우는 공간, 두 팔 벌릴 정도의 면적이란, 창을 휘둘러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자기서사의 너비이기도 하다.

‘중간지점’은 전시 《단독 주연》에 참여하는 작가의 수만큼 공간을 나눈다. 참여작가들은 각자에게 할애된 공간을 자신이 선택한 색상의 벽면과 장막으로 둘러싼다. 작가들은 그 공간 안에 자기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재현된 작업을 넣어둔다. 쉬폰 재질의 커튼을 걷어내고 그 너머에 있는 재현된 신체와 마주할 때, 관객들은 무대장막 너머의 등장인물을 연상할 수 있다. 관객과 작품은 약 1.2~1.5 미터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다. 두 팔을 벌린 정도의 길이를 가진 이 공간의 면적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는 너비라는 점에서, 단 한 사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서사를 올릴 최소한의 단위다. 이 면적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체를 마주한다.

박계희 작가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근현대사의 반사체로 기능해온 자신의 모습을 따듯한 온도를 가진 색감으로 그려낸다. 문현지 작가의 <환>은 스무 해 넘도록 함께 산 할머니의 귀와 자신의 귀를 비단조각으로 만들어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둔다. 방재현 작가는 가상으로 성형한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성형외과 현장에서 사용하는 차트와 함께 걸어두었다. 고현정 작가는 누군가의 용모를 그린 몇 점의 그림 주위에 피부빛으로 채색한 종이로 둘러싸 신체의 표면과 매체의 표면으로 벽면을 메운다. <신체검사>를 그린 김지용 작가는 유년시절의 사진을 다시 경계선이 뿌연 유화로 옮겨냈다. 이민선 작가는 <29일의 금요일>에서 작가 이민선과 흰 천을 뒤집어 써 유령으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영상작업과, 작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마련하였다. 임유정 작가는 반짝이는 아크릴 소재의 조형물 사이로 오늘날 가장 광범위한 자기재현방식인 '셀카'를 영상의 소재로 다룬다.

두 팔 사이의 공간에 작가의 신체가 하나둘 놓인다. 전시는 자화상과 같이 자신을 재현해온 작가들에게 각각 장막이 둘러쳐진 한 칸의 공간을 나누어준다.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클로즈업 된 안면을 그리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는 않았지만, 이들은 각각 자기 신체를 재현해왔다. 그리고 이때 자기재현은 자화상이 제작되는 공간감을 경험할만한 공간에 위치해있다. 떠올려보면, 자화상은 그리는 이(재현주체)와 그려지는 이(재현대상)과 작품(재현물) 세 꼭지점이 들어설만한 정도의 공간에서 벌어진다. 반 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감각하고 바로 제작할 수 있다. 관객으로 하여금 이 좁은 면적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는 것은, 작가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인지하는 근거리의 동선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고, 재현되는 프로세스의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고, 세 꼭지점의 표면을 받아들이는 상황인 것이다. 자화상은 자문자답의 면적을 필요로 한다. 그건 그 자문자답의 거리가 스스로 창을 쥐고 다른 이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키고 싶어하는 최소한의 안전거리이기 때문이다. 그래서 전시는 이 거리 안쪽으로 관객을 초대한다. 좁은 공간구성 안에 들어설 때, 관객은 자신의 형상을 그리는 자화상 프로세스의 면적, 즉 자기서사의 거리로 보다 이끌리게 된다. 자화상이란 바로 이 긴장감에 대한 재현이다. 이 전시는 위태로운 면적에 대한 재현이다. 우리가 이 안에서 마주하게 될 작품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거리 안쪽에서 벌어지는 1인극이다.

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당연히 좁다. 앞서 설명한 ‘我(아)’에 덧붙여 한 글자 더 말해보겠다. ‘나’라는 의미를 가진 또다른 글자 ‘吾(오)’는 ‘우리’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. 차이는 무엇인가. 그것은 말을 나누고 식사를 하는 ‘입(口)’의 유무다. 전시가 마무리될 즈음, 작가들은 이날 모여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 사이의 장막을 걷고 음식을 나누고 말을 나눈다. 단독 주연의 장소, 자문자답의 면적, 자기서사의 거리, 두 팔로 벌린 자리가 다시 그 의미의 범주를 넓히기 위한 자리, 우리가 맞이할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이다. 그러므로 여기 이곳,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이야기가 허용되고 확산되는 너비다. 그러므로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좁지 않다. (글 : 이문석)
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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